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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직 그대뿐이므로

정거장 검사(서울중앙지검)

등록일 2023년11월07일 10시52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정거장 검사(서울중앙지검)

 

막바지 여름날 시작한 이사가 지난 주말에야 끝났다. 침대나 소파, 냉장고처럼 몸집이 큰 짐들만 자리를 잡아주면 이삿짐 정리가 금방 끝나겠거니 싶었건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예전처럼 녀석들을 놓으니 달라진 집 구조와 영 맞지 않아 어색할 뿐더러 동선이 엉켜 불편했다. 뿐만이랴, 창문 개수가 늘어나 커튼을 새로 사야 했고, 묻은 손때만큼 깊이 정이 든 행거가 새로운 옷방에는 어울리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새 장농을 구입해야 했다.

들여놓는 물건이 있으면 내보내는 물건도 있는 법.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손대지 않는 옷을 한데 모아다 의류 수거함에 집어넣고, 쓸만하지만 필요 없는 물건들을 중고품 거래 사이트에 내놓았다. 임관하고부터 여태 거실 한 켠을 지키던 스탠드 조명, 매주 수요일 방문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영어 공부를 하던 책상 의자도 이번 기회에 새로운 주인에게 보내주었다.

사실 이삿짐 정리보다 새 집에 정을 붙이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 아무리 눈길, 손길을 더해봐도 이사를 하고 몇 주 동안은 객식구가 된듯한 기분에 선잠을 자기 일쑤였다. 자정을 코앞에 둔 신데렐라의 심정이 그랬을까? ‘진짜 내 집’에 돌아가야 할 듯 마음이 불안했다. 새 이웃들과도 서먹했다. 예전 이웃들과는 음식을 나눌 만큼 가까웠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새 이웃에게 인사를 건넸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사 덕에 요즘 신이 난다. 글을 쓸 수 있는 서재가 생겼다. 거실 창 밖으로 멀리 산봉우리가 보여 아침마다 가슴이 탁 트인다. 주방도 넓어졌다. 음식 재료를 꺼내 놓을 공간 이외에도 음식을 준비할 자리, 완성된 요리를 올릴 자리가 충분하다. 덕분에 이사를 하느라고 고생한 아내를 식탁에 앉혀 놓고, 그 앞에서 근사한 요리를 선보여 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이사가 즐겁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사를 빌미로 벌어진 사건들이 검사실 캐비닛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보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세입자의 하소연부터 월세는커녕 관리비도 제대로 내지 않던 세입자가 ‘옵션’ 물건들까지 망가뜨리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집 주인의 넋두리까지, 사건들은 각양각색이다. 그 중 가슴 속에 깊이 박힌 사건 하나, 동물보호법위반 사건. 이사와 동물보호법, 얼핏 아무런 교집합이 없어 보이지만 결코 아니다.

장 씨 할머니는 오늘만큼은 세입자 김 씨를 만나야 했다. 밀린 월세만 6개월 분, 참을 만큼 참았다. 열쇠공을 불러 도어락을 떼어냈다. ‘이 놈에게 공임비에, 도어락 비용까지 받아낼 테다!’ 할머니는 씩씩거리며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연실색, 원룸은 쓰레기로 가득했다. 언제 먹었는지 모를 배달 음식들이 플라스틱 용기에 붙은 채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그 틈 사이사이 벌레가 기어다녔다. 밀린 월세보다 당장 이 집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걱정하는 할머니의 코에 악취가 풍겼다. 냄새의 끝에는 마른 걸레가 있었다. 청소한 흔적 하나 없는 이 곳에 걸레라니, 워낙 이질적이어서 할머니는 눈을 비볐다.

몰티즈 한 마리. 윤기가 흘렀을 흰털은 먼지에 뒤엉켜 잿빛이었고, 앙상한 몸통은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바스라질듯했다. 할머니는 반려견 ‘뽀삐’가 떠올랐다. 김 씨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경찰서에 들러 고소장을 썼다. 반려견에게 밥도, 물도 주지 않고 집 안에 가두어 결국에는 폐사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놀랍지만,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반려동물을 집에 두고 이사를 떠난다. 오히려 산이나 바다에 반려동물을 ‘버려 주는’ 주인들이 감사할 정도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또는 순간의 감정으로 반려동물을 버리기로 했다면, 이 장면을 떠올려 주시길 부탁한다. 집에 버려진 반려동물들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모두 욕실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곳이 물을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므로.

반려동물들에게 이사는 즐거울까, 두려울까. 부디 설레는 일이길 바란다. 넓어진 집에 새로 설치될 캣 타워는 어떤 모양일지 기대하고, 새로 산책을 나갈 공원에는 어떤 꽃이 필지 궁금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반려동물들에게는 오직 그대뿐이다.

반정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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